재벌은 누구와 결혼 구경해요

한국에서 명실상부한 체벌을 가장 먼저 쌓은 기업인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다.그런 이병철 회장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인물테스트 자리에 직접 나와 응시자 개개인에게 인상을 가리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이에 대해 이병철 회장 자신은 언젠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전문적인 관상을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을 상품과 심지의 건강상태 등은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에 직접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면 1차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일차적인 탐평량이라는 것이 백발백중의 절대성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인간의 얼굴상은 그 사람의 운명을 묵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재벌 총수 이병철 회장의 상이 바로 부잣집 상이냐고 할 때 필자는 관상에 관해서는 무지몽매하니 뭐라 말할 수 없다.다만 그 물은 일과 관련해 문득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이병철 회장의 부인 박두을 씨에 대해 사치꾼들이 한마디씩 하면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약 20년 전인 65년의 일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재벌의 많은 재산을 들여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기로 하고 그 사실을 공표하는 기자회견장을 마련했다.그 기자회견 자리에는 마침 부인 박두울 씨도 배석했지만 이병철 회장의 부인 노출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처음이었습니다.그런데 이 회견장에 나와 있던 기자들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오갔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아무리 봐도 부자가 아니지만 그의 부인이 엄청난 부상이었다. 이병철 씨가 천하재벌이 되는 덕은 아무래도 부인의 상처 덕분이었나 봅니다. 당사자들은 이런 쑥덕 공론을 어떻게 새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박두을 씨의 관상이 대재벌 마남의 손색이 없다. 함은 모두의 일치된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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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의 고향은 경남 의령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찬우 씨는 토호 천석지기였습니다. 서울 중동고에 재학 중인 16세 소년 때 아내로 맞이한 박두율 규수는 경북 칠곡 순천 박씨족촌 출신이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 후손의 집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자신의 색깔과 부덕을 갖췄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병철 회장은 그 박 씨의 부인을 타고나면서 3남 4녀라는 자녀복을 누릴 뿐 아니라 한국 재벌의 1번 타자로서 기업인으로서의 위업을 이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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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한화약그룹 회장 내외도 김한수 회장 내외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김정희 회장은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화학공판회사에 입사해 청년기업가로 성장할 자질과 경험을 쌓고 있을 때 중매결혼으로 맺어진 신부 강태영 씨는 평택 출신의 재원입니다 강태영 씨는 한일합섬 쪽에서 장복련 씨만큼 신혼 초에는 그다지 고생하지 않았지만 다이너마이트 같은 남편 김정희 씨가 기업가로 대성하는 데 가장 적합한 그늘의 반려자가 되었습니다. 강태영 씨는 남편과 같은 성공회 신자로서 집안 분위기를 따뜻하고 경건하게 꾸미는 데 주력했습니다. 또한 기초학력이 있었기에 현대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지식과 교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남편이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한 주한 외국인들과의 사교가 활발했기 때문에 그에 부응하는 레이디학도 차분하게 익혔습니다. 김정희 회장님의 자택에 초대된 외국 장군들은 이구동성으로 강태영 씨의 조용하고 세련된 접대 솜씨에서 한국 여성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코멘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강태영 씨는 전업주부로서 한계를 가릴 줄 아는 여자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언젠가 부부 동반으로 천안에 갔을 때 김종희 회장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는 북일고에 들르게 됐지만 승용차가 학교 본관 현관 앞에 서고 승용차 그대로 남편이 일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김정희 회장이 브리핑을 듣고 학교 일에 대해 토론을 하느라 1시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학교 직원이 나와 너무 심심할 테니 들어와서 라떼라도 드시라고 보냈다. 그러나 강태영 씨는 다소곳한 미소로 일을 거절했다. 강태영의 분별력과 치료는 이런 것이었다 남편이 1박 2일에 아내가 치맛자락 날에 간섭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회장 부인이라고 회사는 학교에만 나오면 분위기가 산만해지고 임직원은 시시한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는 생각을 굳힌 강태영 씨여서 약 2시간 정도를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며 성경을 읽으며 지루한 시간을 활용한 것이다. 김종회 씨가 환갑을 넘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뒤 과부 강태영 씨는 장남 김승현 씨가 가장 든든한 조언자로 한국화약그룹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돕고 있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애정을 쏟고 한 북일고와 성공회 일에도 신경을 쓰자 그 유지를 꽃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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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회장과 같은 연대로 훗날 재벌기업을 축성한 럭키금성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도 학력과 거리가 먼 신부를 영입했다. 그의 전기 연암구인회를 보면 신부는 담 너머에 사는 천석집으로 장녀인 을수양을사생으로 신랑보다 두 살 위였다.정덕(구인회)은 싫다. 오랜 기간 유가 모두가 그래왔듯이 풍속에 따라 홀연히 결혼한 것이다.필자가 여기서 김영주 구인회 씨 얘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한국 재계에서 4대 재벌을 꼽는다면 현대 삼성 럭키 금성 대우를 받을 수 있는데 그 창업자를 보면 대우 김우중 회장만 40대이고 그 밖의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씨 등은 모두 60대에서 70대다.그런데 이들 노년층 세 명 중 상당수는 모두 일정 시기에 결혼해 이들의 명배우자가 모두 신식 고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무학이나 초등학교 교육 정도에 그친 것이다. 여기서 내려지는 결론은 일정시 이미 돈벌이에 뛰어들어 결국 재계 수장에 오른 사람들은 명배우자의 학력이 떨어지는 상황이지만 조강지처 내조와 은공에 힘입어 가정에서는 자식들이 많고 밖에서는 기업적 성공의 길을 이어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럭키금성 회장 김자경 씨는 1925년생으로 진주고등평소에는 학교 재학 중 결혼했다. 상대는 인근 마을인 당목골 하순봉 씨의 맏딸 정임 님으로 한문의 소양이 있는 규수였다. 그러나 중매쟁이의 그 결혼 경위가 재미있다 구자경 회장 자신의 18세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었다.중학교 4학년 때 징병 문제가 나오면 빨리 결혼시켜 씨앗을 받자는 얘기를 집에서 나왔는데 저는 결혼하지 않으려고 친구 하숙집으로 도망가 두 달 동안 묻혀 있다가 꼭 하라는 소리에 항복하고 말았어요. 사진 한 장을 봐 주었다. 그것도 혼자 찍은 사진이 아니라 특히 못생긴 여자랑 둘이서 찍어둔 거예요. 못생긴 사람이랑 찍어놓으니까 더 눈에 띄죠. 종손이라고 해서 서부경남에서 가장 골동노론의 가정에서 신부를 데려왔다. 신부가 열여덟 살 때였어요. 아내는 집에서 자기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했어요. 시집올 때 보니 딸이 이 정도예요. 이 딸을 제가 훗날 부산사범 교편 생활을 3년 만에 끊어버렸습니다. 학교에 가 본 적이 없는 한 살 위 신부 정임명은 큰딸을 꼬아가며 중학생 구영경 양에게 시집왔다. 그리고 4남 2녀를 얻어 재벌 2세 총수의 부인으로서 여성으로서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양정희 회장의 결혼 과정은 김정희 회장의 경우와 대동소이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양정모 씨는 부산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식량영단 경남지부에 취직해 직장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쌀을 장만하고 범일동에 만류일흥업이라는 큰 정미소를 차렸으며 부유했다. 청년 양정모 씨가 결혼한 것은 24세 때인 1944년 봄, 신부는 범일동 김해김 씨의 규수인 명자 씨, 이명자 씨는 부산의 명문 경남고녀로 손꼽히는 미모였기 때문에 스마트한 청년 양정모 씨와 유별나게 잘 어울리는 원앙이었다. 그러나 양태진 씨는 아들에게 집을 따로 마련해 줬기 때문에 고된 시집살이는 면했다. 그러나 신부 김명자 씨의 신혼 초기는 결코 온상의 화초가 아니었다. 남편과 발꿈치와 함께 국제화학이라는 구두공장을 설립하는 바람에 발꿈치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구두공업이란 장인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종업원에 대한 인간적인 우대와 케어가 곧바로 생산성과 직결됩니다. 이 때문에 양태진 양정모 부자의 창업자는 설이나 추석 명절에는 공장에 푸짐한 음식을 마련해 잔치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직원들에게 점심이나 야식도 맛있게 해주면 그만큼 사기가 오르는 법이어서 김치깍두기 반찬으로 된장국 생선찌개 고깃국도 드러냈다. 이런 종업원의 후생대책에 여성의 손이 닿아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김명자 씨는 이 부분에서 남편을 힘껏 도왔다. 국제화학이 큰 화제를 만나 존망의 기로에 섰을 때나 국제화학과 진양화학이 분리될 수밖에 없었을 때 양정모 회장이 큰 상처를 입자 부인 김명자 여사가 따뜻하게 껴안고 용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은 국제그룹 측근들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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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섬에 김한수 회장은 장봉룡 씨와의 중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신랑 김한수 씨가 어머니께 눈물겨운 모정의 가슴이 죄여 신부를 맞이하게 됐을 때 장봉련 씨는 손에 물을 묻힌 적이 없이 자랐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배우자인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김한수 씨의 어머니는 낙동강 하구 갯벌에서 뻘로 힘든 일을 마다하는 여장부였으니 수선화 같은 며느리로 과연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신부 장복련 씨는 바위 같은 남편의 가슴을 하늘처럼 의지하면서 고달픈 시집살이는 묵묵히 이겨냈습니다. 게다가 8.15 해방 후 김한수 여사가 부산국제시장에서 직물사업을 하다가 대경산업을 일으키고 있어 경남모직 한일합섬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부인 장봉룡 여사의 내조와 조언은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김한수 씨 회장은 가끔 한 말은 저렇다, 제가 기업 육성에만 전력투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가 알뜰하게 운영해줬기 때문입니다. 마누라 자랑하면 안 나간다고 해요. 하지만 나는 아내를 한국의 현모양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사실 장복례와 가까이서 만난 사람들은 갑부의 부인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고 섬세하고 조신한 성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한일합섬그룹이라는 대재벌의 여주인이면서도 손가락에 값진 보석을 끼워 본 적이 없고, 미장원에서 고대를 한 적도 없다고 해서 철부지 시골 부인형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마음을 가다듬고 격정형의 남편이 따뜻하게 쉴 수 있는 가정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지혜로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모델로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82년 여름 김한수 회장이 서거했을 때 영결식에 참석한 고객들은 상복을 입은 장봉룡씨의 체모와 몸가짐에서 불행을 당한 과부의 진면목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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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에는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딸 예리가 이화여대를 졸업할 때마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씨의 차남과 결혼한다는 것을 보고는 입빠른 사람들이 나름대로 한마디씩 했습니다.(예리 씨 이후 이혼) 신랑 신부의 순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516혁명을 일으킨 혁명주체 가운데 소장 장교층 리더였던 김종필 씨가 재벌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많은 유추거리를 던져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무렵 정상적인 정경유착에 대해서는 국민의 시선이 느슨해지기 시작했지만 516혁명과 공화당 창당에 이념적 기수이기도 했던 김종필의 이미지가 이중상으로 넘쳐났기 때문에 김 총리 자택의 결혼을 모든 사람이 경사라며 손사래를 치지 않았던 것이다.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82년 신문사회의 1단 기사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딸 근영양이 풍산금속 회장 유찬우 씨의 아들과 결혼식을 올렸다고 전했습니다. 이 작은 기사를 본 많은 독자들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정으로 잘된 일이라고 독백했습니다. 국가원수와 퍼스트레이디를 부모로 맞아 꿈 많던 학창시절을 알뜰하게 보낸 근영 씨가 부모를 갑자기 잃고 비감한 나날을 보내왔겠지만 이제 대기업 창업주의 며느리로 면사포를 쓰게 돼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앞날을 조용히 축복해 준 것이다.아마 그것이 한국인의 보편적 심정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 땅에 재벌과 정계 관계 실세들의 인척 관계 형성은 70년대 가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꾸어 말하면 권력자 규수가 재벌 2세와 짝을 이루면서 재벌 부인으로 대거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회학적 평가는 일단 유보하고 둘로 하며, 별다른 순서 없이 그 내용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럭키금성 구자경 회장의 장남 구본무 씨는 체신장관보사부 장관을 지낸 김태동 씨의 딸 김00 씨를 신부로 뽑았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3남 이건희 씨는 법무내무장관인 홍진기 씨의 딸과 결혼했으며 홍진기 씨는 언론의 대표자가 돼 삼성그룹 비중이 높은 글이 됐다.앞의 김용주 회장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지낸 오 씨의 3녀를 둘째 며느리로 맞았다. 이보다 훨씬 전에 장남 김창선 씨는 민주당 실세였던 오** 씨의 장녀 오** 씨와 결혼했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용남 정몽준 씨는 외무장관을 지낸 김동조의 규수를 맞아 현대중공업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 대한산업에 설원식 사장의 부인은 은행가 의외로 외교관이었던 임 씨의 딸 임 씨와 결혼했고, 동생 설원철 씨의 부인은 외무장관 주미대사를 지낸 김** 씨의 딸 김** 씨다. 조홍재 효성그룹 회장은 장남 조석래 씨를 재무장관으로 지냈고, 차남 조양래 씨는 변호사 홍 씨 규수 홍 씨와 3남 조욱래 씨는 농림장관을 지낸 김*대 씨 규수 김*주를 연결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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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 2세 오너인 김승연 회장은 과거 내무장관을 지낸 서*화 교수 서영민 씨와 화촉의 인사를 했다. 둘째 아들 김호연 씨는 공군참모총장 교통장관을 지낸 김 씨의 사위가 돼 측근들의 축복을 받았다.한화그룹 2세의 차남 김호연 씨는 김 씨의 사위가 됐으며 백범 김호연 씨는 김신의 사위가 됐다. 김승현 호영씨 형제는 물론 어머니 강영영영씨도 절세의 애국자 이신 김구 선생 가문과 사돈관계가 된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한다.이런 사돈관계의 형성은 정치권 관계의 이른바 권력 있는 집에서 신부를 데리러 오는 것보다 훨씬 높은 자긍심을 누릴 수 있는 일이다. 한일합참의 2세 총수인 김중원 사장도 그런 자부심을 누릴 수 있다. 최씨의 부인 최씨는 서울대 교수 최웅씨의 딸이자 32독립선언서에 기초한 리쿠도 최남선 선생의 손녀라는 것을, 김한수 회장은 장남의 며느리를 맞을 때 최남선 선생의 손녀라는 점을 특히 크게 기뻐해 수당 김씨 일가의 고담한 빛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노산 이은상 씨와 친하게 지낸 것도 은은한 마음에 발로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럭키그룹 2세 4남 구투 씨 부인은 변호사 이**배 씨의 딸 이*숙 씨로, 5남 구*극 씨가 이화여대 교수 조*대 씨의 딸 조*란 씨를 부인으로 영입한 것도 문화계 명사 가문의 결혼 사례 영풍상사 영풍광업 고려아연을 주력 기업으로 하는 영풍그룹 최 씨 가문에서는 장남 최*걸 씨를 비롯한 형제가 재벌의 딸보다는 품격 있는 가문에 재원을 영입한 특색이 있다. 주류업체이자 독보적인 존재인 백화양조 역시 며느리를 문화계 명사의 규수로 구해냈다. 창업주 강정준 씨의 장남 강*수 씨는 서강대 유*자 씨를 신부로 맞았고, 차남 강*철 씨도 원광대 숙 교수의 딸 최*아 씨를 배우로 삼았다. 형제가 모두 교수의 딸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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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식품의 대명사인 라면은 한국인의 식성에 유별나게 잘 어울리고 제2의 쌀로까지 불린다.” “그 라면 제조업체로 세계 1위에 양산 체제를 갖춘 삼양식품에 창업주 정준윤 회장의 부부 사이는 재계 인사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정준윤 회장과 부인 이*순씨의 뜨거운 부부애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앙금이 감돌고 있다고 합니다. 전증윤 회장의 고향은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이며, 아버지는 전명흠 씨다. 그는 일정시 선린상업학교에서 공부한 뒤 총독부 우정국에 취직하여 주로 보험업무를 담당하였으나 전쟁 말기에 대피하여 철원으로 근무처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중윤 회장의 형이 요절하자 그는 장남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부모의 명령에 따라 1944년 11월에 결혼하였습니다. 신부는 마을에서 십 리쯤 떨어진 원동면에 거주하는 이명규 씨의 딸로 지역 명망가의 규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농촌 지방의 부유한 집안에 보편적인 결혼사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앙금은 8.15 직후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김화군은 38도 이북이 되어 해방과 함께 소련군의 점령하에 들어갔고 곧 공산당이 설치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청년 정준윤 씨는 삶의 무대를 서울로 생각하고 먼저 상경해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가능하면 부모님과 신부까지 함께 서울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전명흠 씨는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을 쉽게 떠날 형편이 아니었다. 시골에 뿌리내린 가산은 쉽게 정리할 수도 없었어요.”이북 땅은 희망 없는 세상이 됐다””소련군도 그렇고, 공산당도 그렇고, 모두 불량 한 당 같은 아이들이 쉬니까, 착한 사람들은 정착하는 장소에 안 된다””그래서 젊은이들은 고향에 미련을 갖지 말고 희망이 있는 서울로 월남해야 합니다”빨리 서울로 올라간 거인 전 나카 준(쵸은・쥬은융)씨는 아버지의 말에 용기를 얻었지만, 신혼 1년밖에 안 된 신부를 대동해야 옳으냐 스파이가 아닌가 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 씨가 전에 죽었으니 그의 부인이 맏며느리 벽에서 시부모를 모셔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신혼 1년밖에 안 된 아내를 이국땅에 남겨둔 채 언제 다시 만나야 할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생이별을 한다는 것은 비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들의 고민을 꽤 간파한 아버지가 말했다 당신이 서울을 오를 때 새 아이도 데려가야 해요. 시부모님도 물론 중요하지만, 신자를 젊은 남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노인 걱정 말고 함께 서울에 가서 기반을 닦아라. 장인의 이 같은 선언으로 신부 이*순 씨는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신랑을 쫓아 38선을 넘어 서울로 오게 된 것이다. 이후 38선은 굳어지고 625전쟁을 맞아 이산가족이 수없이 생겨났던 것을 생각하면, 정종윤 이계순 씨 부부가 서울에서 삶의 터전을 닦고 삼양식품그룹이라는 대기업을 만든 것은 정명흠 씨의 명쾌한 결단이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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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실업에서 김종수 사장이라고 하면 아직 전국적인 지명도까지 얻지 못한 기업인이다. 그러나 80년에는 수출 1600만달러의 철탑산업훈장을 받았고 스리랑카의 코리아랭커거먼트라는 합작회사를 세워 업계에서는 예비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김정수 사장의 부인 이*현씨가 여원에 기고한 나의 빠른 시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어떤 사업가의 아내가 된 나는 그를 만나면서 그에게 올라타야 했다. 여러가지 길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가 원하는 아내가 되는 길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각별히 작은 것이었다. 가정은 아내에게 완전히 맡긴 상태의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로에게 맡겨진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의도가 모두 준 것이었다.즉, 착한 아내, 착한 엄마만 돼주면 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집안일에 열중하는 기업인들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먹고사는 일의 충실함이다.하지만 남편이 기업에 열중해 때로는 고심하고 초조해 할 때는 부인된 입장에서 뭔가 적극적인 내조의 길은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형 씨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하지만 나는 보통 그것에 대해 남편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도 적은 일로 큰 힘을 주려고 했다. 그의 사업을 시작하려면, 그의 뒤에서 묵묵히 돕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남편 김종수 사장을 진심으로 내조하는 길을 뒷전에서 도와주면서 내가 아는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정주영 회장의 지론인 담담한 마음가짐과 맥락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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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로 시집간 광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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